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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진짜역사 | Posted by 졸당16세 2011. 9. 3. 05:15

고구려 태왕 유리

유리왕에게는 기록에 나타난 아들만 네 명이다. 그 4형제의 어머니가 누구인지는 명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역시 기록에 의하면 유리왕은 세 명의 여자를 취한다. 첫째 여자는 다물후 송양의 딸로 결혼 1년 남짓 살다 죽었다. 두 번째 여자는 홀천인의 딸 '화희'이고, 세 번째 여자는 한인(漢人) 출신의 '치희'다. 그러나 치희는 화희의 질투에 못 이겨 친정으로 도망갔으므로, 네 아들은 '화희'가 낳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제2 대무신왕(大武神王)편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와 다소 혼동을 일으키게 만든다.

대무신왕이 즉위하니(혹은 大解朱留王이라고도 함), 휘는 무휼(無恤)이요, 유리왕의 셋째 아들이다. 나면서부터 총명하고 장성하니 영특하여 큰 지략이 있었다. 유리왕 즉위 33년 갑술(甲戌)에 태자가 되니 그때 나이 11세였으며, 이 때에 이르러 즉위하였다. (王의) 어머니는 송씨니, 다물국왕 송양의 딸이다.


유리왕과 결혼한 송양의 딸은 결혼 1년 남짓 살다 죽었는데, 그녀가 셋째 아들을 낳았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이것은 삼국사기 저자 김부식의 오류라고 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아무튼 유리왕의 첫째 아들은 태자 도절(都切)인데, 재위 14년에 동부여왕 대소가 서신을 보내어 서로 볼모 교환을 청한 일이 있었다.


유리왕이 도절을 부여왕 대소에게 인질로 보내려고 하자, 태자는 두려운 나머지 부여국으로 가지 않았다. 이때 부여왕 대소는 크게 노하여 군사 5만 명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그러나 때마침 대설(大雪)이 내려 얼어죽는 병사가 많으므로 도중에 되돌아가 버렸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난 후인 유리왕 재위 20년 정월에 태자 도절은 죽고 말았다. 기록에는 태자가 왜 죽었는지 나와 있지 않지만, 부왕의 명을 어긴 데 대한 죄책감에 시달리다 병사한 것으로 유추된다.

아무튼 첫째 아들 도절의 죽음은 유리왕에게 큰 충격을 주었을 것임에 틀림이 없다. 다만 잘 이해가 기지 않는 것은 일찍이 태자로 책봉할 만큼 첫째 아들을 사랑했음에도 불구하고, 부여왕 대소에게 인질로 보내려고 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유리왕의 아픔을 우리는 헤아려야한다. 그 당시의 고구려의 권력 구도는 제가회이라고 각부족의 족장이 부족을 대표하는 제가가 되어 왕권을 견제하는 역할을 해왔는데 그때의 정치구도가 유리왕의 기반없이 대권을진 것이 군장들의 업신여김을 받아 왕이 힘없는 군주가되 제가들의 압력 때문에 사랑하는 태자를 볼모로 보내지 않았나 생각된다. 우리는 그 점을 잘생각하고 이글을 읽어야할것으로본다.


유리왕은 첫째 아들이 죽은 지 3년만인 재위 23년에 둘째 아들 해명(解明)을 태자로 세웠다. 나라의 경사가 있는 날 죄인을 사면(赦免)하는 것은 그 당시에도 관례였던 모양이다. 해명을 태자로 삼고 나서 왕은 '국내(國內)의 죄수(罪囚)를 대사(大赦)하였다.'고 삼국사기 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로부터 불과 4년이 지난 유리왕 27년에 비극을 예고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태자 해명은 힘이 세고 무용(武勇)이 남달랐다고 한다. 당시 태자는 새로운 수도 국내성으로 부왕을 따라가지 않고 고도(古都), 즉 추모왕이 고구려를 건국한 졸본성을 지키고 있었다. 여기에서도 부왕 유리왕과 태자 해명 사이의 성격적 갈등이 엿보이고 있다. 부자간에 국내성 천도 문제를 놓고 심각한 의견대립이 있었을 것을 미루어 짐작하게 하는 것이다.

아무튼 그 무렵의 어느 날인가, 고구려 태자가 힘이 아주 장사라는 소문을 들은 황룡국왕(黃龍國王)이 사람을 보내어 강궁(强弓)을 선물하였다.

그때 태자 해명은 황룡국왕이 보낸 사신이 보는 앞에서 활시위를 당겨 강궁을 단번에 부러뜨려버렸다.

내 힘이 센 것이 아니라 이 활 자체가 너무 약하군!"


젊은 나이의 태자는 이렇게 마음껏 힘 자랑을 하여 활을 보낸 황룡국왕을 조롱하였다. 당시 나이 20세의 젊은이로서는 대단한 기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유리왕은 황룡국왕을 두려워하여 사신을 보내 다음과 같이 전하였다. 해명이 자식으로서 불효하니, 청컨대 나를 위하여 죽여주시오."

유리왕은 태자를 대신하여 황룡국왕에게 백배사죄를 한 것이다.

이때 오히려 황룡국왕은 해명의 기개가 마음에 들어, 다시 사신을 보내 태자를 초청하였다.

태자가 그 초청에 황룡국으로 가려고 하자, 주위에서 신하가 말렸다. 지금은 위험합니다.

가지 마십시오."하늘이 나를 죽이려하지 않는데, 황룡왕이 나에게 어찌하겠느냐?"

태자 해명은 당당하게 말하며 황룡국으로 갔다.


이 때 황룡국왕은 여차하면 해명을 죽이려고 하였으나, 그를 만나본 후 보통 인물이 아님을 알고 오히려 예로써 대접해 다시 고구려로 돌려보냈다.

그러나 그 다음 해인 재위 28년에 유리왕은 태자 해명에게 칼을 보내 자결을 명하였다.

"내가 천도(遷都)한 것은 백성을 편안히 하고 나라를 굳건히 하기 위함인데 너는 어찌 나를 따라오지 않고 힘센 것만 믿고 이웃나라와 원한을 맺어 나라를 위태롭게 하느냐?"


이와 같은 유리왕의 말을 전해들은 태자 해명은 곧 칼을 들어 자살하려고 하였다. 그때 주변의 신하가 말렸다. 대왕의 장자가 이미 죽었으므로 태자는 다음 대를 이어야 하는데, 어찌 사자의 말만 듣고 가벼이 자결하려 하십니까? 지금으로선 사자의 전언이 거짓인지도 알 수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태자가 그 말에 대답하였다.


저번에 황룡왕이 강궁을 보내주었을 때 나는 그가 우리 나라를 가벼이 여길까 염려하여 활을 꺾어 그에게 보답한 것인데, 뜻밖에 부왕(父王)에게 꾸지람을 받았다. 지금 부왕이 나를 불효자라 하여 칼을 보내 자결을 명하시니, 어찌 아버님의 명을 거역할 수 있겠는가?"


태자 해명은 그 길로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리고 들판에 거꾸로 창을 꽂아놓고 멀리서 말을 달려오다가 그 창에 몸을 날려 자결하였다. 그의 나이 21세 때였다.

왜 유리왕은 태자 해명에게 칼을 보내 자결을 명하였을까. 여기서 잠시 그의 심리적 상황을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 그는 우유부단한 성격에다 감성이 예민하기까지 하였다. 우유부단한 성격은 겉으로는 온화해 보이지만, 안으로 참는 인내심이 강한 반면 화가 나면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폭발한다. 더구나 그는 한인 출신의 치희가 화희의 질투에 견디지 못해 친정으로 도망쳤을 때 그녀를 못 잊어 '황조가'를 부르기까지 할 정도로 감성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다시 말하면 태자 해명의 자결 사건은 유리왕의 우유부단함과 감성적이 성격이 순간적인 충돌을 일으키면서 빚어낸 비극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은 대체 유리왕이 그처럼 두려워한 황룡국이 어느 나라였느냐는 것이다. 삼국사기 에는 황룡국왕이 누구인지, 황룡국이 어느 나라를 말하는 것인지 명확하게 언급되어 있지 않다. 아마 그 당시 아주 강력한 국가 체제를 갖춘 나라였을 것으로 유추된다. 따라서 당시 고구려 인근의 나라 중 강국은 북부여와 동부여 밖에 없었기 때문에,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황룡국왕을 북부여왕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북부여왕(北扶餘王:본보기의 황룡국왕)이 해명에게 강한 활을 보내어 그 힘을 시험해보려고 하자, 해명이 그 자리에서 그 활을 당겨 꺾어 북부여 사람의 힘없음을 조롱하였다.

결국 태자 해명이 자결하고 나자 유리왕은 재위 33년에 셋째 아들 무휼(無恤)을 다시 태자에 책립하였다. 무휼의 나이 11세 때였다.


그리고 37년에는 넷째 아들 여진(如津)이 물에 빠져 죽는 사건이 일어났다. 기록에 의하면 유리왕은 그 아들의 죽음을 몹시 애통해 하였다고 한다.


결국 유리명왕의 아들 4형제 중 무휼만 살아남고, 나머지 세 아들은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것도 첫째와 둘째 아들은 자신의 우유부단하고 감성적인 성격 때문에 잃었고, 늘그막에 극진한 사랑을 주던 막내아들은 물에 빠져 죽었으니 그 비애감은 그 무엇에도 비길 수 없을 만큼 절통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유리왕은 두 아들을 죽게 만든 자신을 비관하며 평생 가슴에 못을 박고 살아온 데다, 막내아들을 잃을 슬픔이 겹쳐 마음의 병이 깊어졌던 모양이다. 아무튼 그는 여진이 죽은 그해 7월에 두곡(豆谷)의 이궁(離)宮)에 가서 머물다가 그로부터 3개월 만인 10월에 죽고 말았다. 기록에는 죽음의 원인이 나오지 않고 있으나, 마음의 병이 깊어져 병사했을 것으로 추측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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