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의 한 서린 오백년의 인물난은 조선의 국사 무학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진주는 풍수지리학적으로 명당중의 명당이라 장군과 재상이 많이 나와 한반도의 귀족명문이 즐비한 명지였다. 지리산을 배경으로 한 진주의 비봉산과 복호산이 진주의 내울타리역활을 하고 망진산이 남강 물줄기를 안산 [현진주성]으로 유도하여 흐르게하여 활기가넘치는고을이다.
그리고 진주는 특수한 지리 역사적인 위치에 있다. 고려시대에는 무신정권 최씨의 지역 기반이었다. 조선시대 들어 그 지세의 뛰어남에 이성계의 사부 무학대사가 무척이나 경계하던 곳이었다. 이에 이성계는 자신의 정권에 도전할 만한 인물이 나올것을 경계 하기 위하여 무학대사로 하여금 진주 산세 곳곳을 변경케 하였다. 무학대사가 특별히 진주지세를 염두에 둔 것은 진주에 고려 최씨정권의 지역기반이 있었기 때문에 상징적으로 그렇게 했다고 생각한다. 최씨 정권은 강한 쿠데타세력이고 그 지역적 기반이 진주이기에 장차 이씨 정권에 도전세력이 나올까 염려하여 그러하였다고 생각한다. 고려 무신집권 직전에 진주강씨의 번성을 우려한 대표적 문신이며 외척인 이자겸,의 상징적 행위도 물론 있다. 무신들의 지역기반이 될만한 진주를 그냥두면 안되기 때문에 신경이 쓰였을 것이라 본다.아래 간략한 역사적배경을보자.
이성계(李成桂)가 역성형명으로 조선을 세우고 왕으로 등극후(登極後)에 산남(山南)지방에 鄭, 河, 姜등의 인물이 많이 나와 그중에는 조선을 위태롭게 할 역적이 염려하여 국사무학에게 부탁을 하여 진주지방을 순시토록 하였다. 과연 명당(明堂) 명승(名勝)의 자리이며 더욱이 비봉산 의 지맥(地脈)이 대롱골 의 황새터 와 연결되어 있음에 절로 놀랜 무학대사는 지금의 비봉산과 봉원초등학교 사이의 가마못을파 맥을 끊어서 한시름 놓았습니다.
다시 동쪽을 살피니 또 하나의 걱정거리가 있었으니 비봉루(飛鳳樓) 옆자리 향교(鄕校)가 엄숙하게 자리 잡고 있었으니 무학대사를 또한번 놀라게 하였습니다. 「어쩌면 이 조그만한 비봉산을 둘러 싸고 이렇게도 좋은 자리가 많을까? 이태조(李太祖)가 신기(神奇)한 사람이 많이 나올 것을 염려하고 장차 새로 만든 이씨조선(李氏朝鮮)을 뒤엎을 역적(逆賊)질 할 사람이 나올땅이라 우려(憂慮)하더니 정말로 그러한 땅이로고」하여 향교(鄕校)를 옮겨버렸습니다.
다시 남쪽을 살피는데 남강(南江下流)새벼리덤 고개 밑에 돌산(石山)이 튀어나왔는데 마치 용(龍)이 꿈틀거리는 모습을 하고 있음에 더욱 놀라 질겁을 한다..지금도 우리들은 석용(石龍)골이라 부르고 있는 곳이다. 대사는 크게 신음을 하며 음- 정말 지독한인재의 땅이로구나 웬 이렇게도 골골마다 명당자리만 있다니 하며 인부를 시켜 석용(石龍)을 파괴하는데 떨어져 나오는 돌마다 하나 하나가 모두 용(龍)비늘 같았고 그 룡비늘 같은 돌이 떨어져 나올적마다 붉고 붉은 빨간 피가 흐르는데 이 핏줄기가 의령(宜寧)에까지 흘러 갔다는 전설(傳說)이 전해오는 새벼리 무학대사는 참으로 진주 인에게는 원망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그 뒤에 무학대사는 한양에 돌아가서 상세하게 보고하게 되었다.
무학대사가 지맥을 끊은 이후에는 보수안정(保守安定)의 정치적으로 무지한 고을로 바뀌었으니 참으로 진주 사람인우리는 이 전설을 음미하고 다시한번 생각을해보아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진주의 발전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인물을 키워야 되겠습니다.
정 당에 구애받지 않는 진정한 인물을 공천으로 자지 우지 되는 인물로 만들지 맙시다.
우리는 정 당에서 공천을 주든 말든 우리의 일꾼을 우리 의지대로 선출하여야 되겠습니다.
석류공원 인공폭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