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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진짜역사 | Posted by 졸당16세 2010. 2. 12. 04:25

1황하 문명과 2 한단고기

BC 6000년, 만주 요하 지역에서 찬란한 문명이 꽃피기 시작했다.황하문명보다 천년이나 앞선 고대문명. 특히, BC 3500년경 꽃 핀 홍산문화에서는 대규모 적석총, 제단, 신전이 발굴되었는데 이것은 이 지역에 이미

초기 국가 단계에 진입한 세력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요하유역을 무대로 문명의 새벽을 연 이들은 누구일까? 발굴 결과, 요하문명은 중국 중원과는 확연히 구별되며 오히려 우리 민족의 문화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이 드러나고 있다.

장장 4000㎞의 만주 탐사 대장정 만주 땅에 아로새겨진 민족의 기원을 찾아간다.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른 문명
이집트·메소포타미아·인더스·황하문명은 인류의 4대 문명으로 불려왔다. 그러나 1980년대부터 발굴되기 시작한 요하문명으로 인해 세계사는 다시 쓰여져야만 한다.
요하문명은 이들 4대문명보다 시기적으로 1000년 이상 빠르다. BC 6000년, 요하문명의 새벽을 열었던 사해·흥륭와 문화에서는 빗살무늬 토기와 옥귀걸이가
출토되었다.
그런데 이 옥귀걸이와 꼭 같은 모양의 옥귀걸이가 강원도 고성군 문암리에서도 출토되었다. 대륙을 건너온 같은 모양의 옥귀걸이. 우리 민족의 시원(始原)을 밝혀줄 단서가 아닐까.

 

요하문명의 꽃, 홍산(紅山)문화
요하문명은 홍산에서 그 꽃을 피운다. 홍산인들의 성도(聖都)인 우하량에서 여신묘가 발견되었다. 그곳에서는 두 눈을 푸른 옥으로 장식한 여신상도 함께 발굴되었다. 주변에 흩어져 있는 신체의 조각들로 봐서 사람크기와 2배, 3배의 여신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여신묘에서 출토된 흙으로 빚은 여신의 얼굴, 눈동자에 푸른옥이 박혀있다
또한 우하량 각지에서는 수많은 적석총이 발견되었다. 한 변이 60m가 넘는 거대한 피라미드형이다.
제단, 신전, 무덤이라는 정신문명의 삼위일체의 유적들과 매우 정교한 옥기의 대량 생산 등은 홍산인들이 이미 ‘초기국가단계’에 접어들었음을 보여준다. 홍산문화의 발견은 중국으로서는 커다란 충격이었다.

▲우하량 적석총

 

흔들리는 중화사상, 중국의 새로운 국가 전략
중국은 예로부터 황하문명을 자신들의 시원으로 삼고, 만리장성 이남을 중원이라 믿었다. 그러나 오랑캐의 땅이라 여겨왔던 만리장성 이북의 요하지역에서 황하문명보다 천 년 이상 빠르고 이미 초기 국가단계에 진입한 요하문명이 속속 발굴되자, 수 천년간 지속되어온 중화사상은 크게 흔들린다.
중국은 새로운 국가전략으로 ‘통일적 다민족 국가론’을 내세웠다. ‘지금의 중국 영토 안에 있는 모든 민족은 예로부터 중화민족이며 그들의 역사도 중국 역사의 일부‘라는 것이다. 그 일환으로 국가 주도의 역사공정에 착수했고, 그 핵심이 요하문명을 중국 문명의 시원으로 확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요하문명이 중국 문명의 시원일까?

 

요하문명의 주도 세력은 누구인가?
BC 2000년 경, 홍산문화는 하가점 하층문화로 이어진다. 하가점 하층문화에서 발견되는 치를 갖춘 석성, 비파형 동검 등이 발견되는데 이는 중원의 것과는 확연히 구분된다. 이것은 요하문명의 주도 세력이 중화민족과는 다른 집단이라는 것이다. 치를 갖춘 석성은 고구려 성의 특징을 보여주며, 비파형 동검도 그 중원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요하유역과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하가점 하층문화는 완전한 국가단계라고 평가되는데, 기원전 2,000년 경 요하유역에 있을 수 있는 국가는 무엇일까? 모든 사서를 뒤져봐도 그것은 고조선 외에는 없다.

흥미로운 것은 홍산문화 우하량의 여신묘에서 곰의 턱뼈와 진흙으로 만든 곰의 발도 함께 출토되었다는 점이다. 또한 제사장으로 보이는 인골은 곰의 얼굴을 형상화한 옥룡을 가슴에 달고 있었다. 이는 홍산인들이 여신과 함께 곰을 숭배하는 곰 토템족이었다는 증거다. 우리 민족의 기원 신화인 단군 신화를 떠올릴 수 밖에 없다.

▲여신묘에서 발견된 진흙으로 만든 곰발 소조상
그러나 주류학계에서는 단군신화를 신화로서만 인정할 뿐, 단군 조선이라는 역사적 실체는 부정해 왔다. 이제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한 요하문명을 바탕으로 단군조선의 실체에 대해 적극적인 검토를 해야 할 때이다.

 

1.
환단고기는 대한민국의 뿌리역사와 국통을 담고있습니다.

국통이란 대한민국 이전의 나라는 조선이었고 조선이전의 나라는 어떤 나라였고 하는 나라의 법통을 말합니다. 한 개인에게 가족사가 있듯이 나라에는 국통이 있는 것이죠. 할아버지 없이 내가 존재할 수 없는 것이죠. 환단고기는 바로 대한민국이라는 국통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구약이 있듯이 우리나라에는 환단고기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도 됩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역사는 단순히 과거사실의 나열이 아닌 정신을 담는 그릇이라는 것입니다. 환단고기에는 우리 민족 수천년 열조들의 하늘과 땅 신명세계등 진리에 대한 깨달음과 웅혼한 정신, 세상을 다 품고 남는 그런 큰 기상이 담겨져 읽는이로 하여금 통쾌함은 물론 대한민족의 아들딸로 태어났다는 것에 큰 자긍심을 느끼게 합니다.



위조아닌 부분을 물의셨는데요 바로 환단고기 책 전부 입니다. 물론 일부 위조라고 지적되는 부분이 있지만 그것은 아주 부분적인 것입니다. 손가락끝이 다쳐서 다른 사람 피부로 조금 이식을 했다고 해서 그 사람이 바뀌지는 않겠죠. 큰 틀을 보고 부분적인 문제제기가 부질없다는 것을 알아야 겠습니다.



환단고기가 진실이라는 것을 밝히기 위한 많은 노력들 중에서 한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환단고기에 지금부터 3700년전 단군조선 13세 흘달 단군 50년(서기전 1733년) '오성취루五星聚婁'라고 하여 5개의 별이 서쪽하늘에 있는 루성을 중심으로 모이는 장관이 연출되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수천년전의 천문현상을 임으로 위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겠죠. 이런 의미에서 서울대 천문학자 박창범교수와 라대일박사 등이 지금까지 밝혀진 천문학을 이용하여 증명을 한 것입니다. 서기전 1734년 7월 13일 일몰 직후 금성, 목성, 토성, 화성 그리고 추가로 초승달까지 일렬지어 하늘에 나타났다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박창범 교수는 "이같은 현상을 우연히 맞출 확률은 0.007%에 불과하며, 책의 조작 여부에 관계없이 역사적인 사료로서 가치가 있다"고 했습니다. ("하늘에 새긴 우리역사" 책)



환다고기에 담긴 대한민국의 국통을 간단히 정리해 보겠습니다. 과연 이런 국통을 위조할 수 있을까 생각도 하면서 보셔도 되겠습니다.



BCE 7197년 환국이라는 지구상에서 가장오래된 나라를 열었습니다. 중앙아시아 파미르 고원의 천산을 중심으로 동서 2만리 남북 5만리의 영토에 12개 연방국이 있었습니다. 1대 안파견 환인으로부터 7대 지위리 환인까지 3301년간 지속되었습니다.



BCE 3897년 배달국이 환국을 이었습니다. 거발환 환웅천왕이 지위리 환인으로부터 도권의 상징인 천부인을 전수받고 문명개척단 3000명의 제세핵랑군을 이끌고 백두산 부근에서 웅족 호족을 아울러 신시를 열었습니다. 14대 자오지천왕, 일명 치우천왕은 뛰어난 병법과 신무기로 가장 넓은 영토를 확장하였고 수도를 청구로 옮겼습니다. 중국의 시조인 황제헌원을 무릎꿇려 신하로 삼았으며 그 이후로 병법의 시조로 신앙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18대 거불단 환웅천왕까지 1565년간 배달국이 이어졌습니다. 우리나라를 배달의 겨레라고 하는 것을 여기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배달국에는 최초로 우주의 변화이법이 담긴 8괘를 그린 태호복희씨, 농경 의학의 시조이며 성씨의 시조인 신농씨 등 인류문화의 성자들이 있었습니다. 치우천황은 2002년 월드컵때 붉은악마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지만 역사속에 우리조상 황제라는 것을 아는 분은 드문것 같습니다.



BCE2333년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열었습니다. 왕씨왕의 비왕으로 24년간 섭정하다가 웅씨왕 전사후 배달국 말기 혼란을 바로잡고 천제로 추대된것입니다. 수도를 송화강 하얼빈에 두었는데 2천년후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민족을 유린하던 이토오히로부미를 저격한것은 국통의 심장부에서 일으킨 거사라고 하겠습니다. 단군왕검은 비서갑 하백의 딸과 결혼하여 부루, 부소, 부우, 부여 네 아들을 두었습니다. 삼한관경제으로 나라를 통치하였고 진한에 단군이 직접통치하시며 마한과 번한에는 부단군을 두었습니다. 초대 번한의 부단군은 자오치 환웅의 후손인 치두남이었고 마한의 부단군은 웅백다였습니다. 초대 단군시대에 큰 홍수가 있었는데 강화도 마리산에 참성단을 쌓고 하늘의 상제님께 천제를 드렸고 오행치수 비법으로 홍수를 다스렸습니다. 이 비법을 부루태자가 중국의 우에게 전하여 치수에 성공하게 도와줍니다. 이 때가 서양은 노아시대로 역시 큰 홍수가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노아방주에 탔던 사람과 동물만 살아남은게 아니고 동서양에 많은 민족들이 홍수를 극복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동시대에 서로다른 문화권이 공존하면서 기록을 남긴 것이죠.

BCE1285년 22대 색불루단군은 21대 소태단군을 보좌하던 우현왕으로 있다가 혁명을 통해 단군에 오릅니다. 수도를 백악산(장춘)으로 옮기고 국가체계를 삼한에서 삼조선으로 바꾸었는데 기존 체계와 큰 차이는 군권을 부단군에게 준것입니다. 색불루 단군은 번조선 부단군에 서우여를 막조선 부단군에 여원흥을 임명합니다.

BCE425년 44대 구물단군은 당시 우화충의 반란으로 도성을 뺏기고 구물단군이 피난길에서 붕어하시자 백민성의 욕살로 있다가 이를 제압하고 제위에 오르게 됩니다. 수도를 장당경(개원)으로 옮기게 됩니다.

나라가 점점 어지러워지던 중 46대 고열가 단군이 후사 없이 붕어하시자 상장군 고열가(43대 물리단군의 현손)가단군으로 추대됩니다. 군권의 약화와 지방 군웅들의 할거 속에서 5가에게 국정을 맡기고 입산하여 신선이 되었다고 합니다. 절에 가보면 산신각에 호랑이를 옆께 끼고 계신 산신이 바로 고열가 단군입니다.



BCE239년 해모수가 북부여를 건국하게 됩니다. BC232년 해모수는 부여 고도 장당경에 가서 5가(우가 마가 저가 구가 양가)는 공화정을 접수하게됩니다. 이때 중국에서는 한나라가 위세를 떨치던 때입니다. 한고조 유방이 죽자 그 부인 여태후가 공신을 숙청하는 과정에서 노관이 흉노로 도망가고 노관의 부하 위만이 번조선에 투항하게 됩니다. 당시 번조선왕은 해모수가 임명한 기비를 이은 기준이었는데 위만을 받아들여야 될지를 해모수에게 물었는데 받지마라고 하였으나 곧 해모수는 붕어하게 됩니다. 기준은 위만을 받아들여 국경수대비를 맡겼는데 다음해에 군사를 모아 반란을 일으켜 기준을 몰아내고 (BCE 194) 왕권을 찬탈합니다. 이때 준왕은 배를 타고 한반도로 와서 한씨의 조상이 되었다고 하고 상장군 탁이 현재의 익산지역에 월지국을 건국하고 (마한) 이를 주체로 조선의 삼한관경제를 본받아 마한 변한 진한으로 이루어진 남삼한 연맹을 건설합니다.



BCE108년 한무제가 군사를 보내서 위만정권을 치게 되는데 위만의 손자 우거는 내부 분열로 패망하게 되고 북부여의 땅까지 침범하게 됩니다. 이때 고열가단군의 후손인 고두막한이 의병을 일으켜 한무제를 격퇴시키고 BCE108년 졸본에서 동명부여를 세우고 즉위하게 됩니다. BCE86년 해모수 모수리 고해사를 거쳐 4대 단군이었던 고우루 단군에게 제위를 받게됩니다. 이때 고우루 단군의 동생 해부르는 가섭원에 보내고 가섭원부여(동부여)를 세웁니다. 얼마후 이곳에서 고구려를 세우는 고주몽이 탄생하게 되죠.



고주몽은 갈등속에서 고두막한 아들 고무서 단군이 통치중인 화강넘어 졸본땅으로 피신합니다. 고무서 단군의 아들 소서노와 결혼합니다. 고무서가 붕어하고 BCE5년 고주몽이 북부여 7대 단군에 등극하게 됩니다. BCE37년 나라이름을 고구려로 고치고 조상들의 고토를 회복하겠다는 뜻의 다물을 국시로 삼습니다. 이 뜻을 광개토대왕이 이루었다고 해도 되겠죠. 가장 넓게 나라영토를 넓히게되니까 말이죠. 고주몽, 유리를 이은 대무신열제때 대소의 동부여를 쳐서 합병하게 됩니다. 대소의 동생이 북으로 무리를 이끌고 가서 북갈사국을 세우고 북갈사는 얼마후 고구려에 복속됩니다. 고구려는 19대 광개토대왕에 크게 영토를 넓히고 28대 보장왕까지 역년 705년 지속됩니다.



한편 소서노의 아들 온조와 비류는 각각 나라를 세우는데 결국 온조의 백제국으로 통합되고 백제는 13대 근초고왕 이후 26대 성왕때 국호를 잠시 남부여라고 개칭하였고 31대 의자왕까지 역년 678년 지속됩니다.

BCE 238년 고조선이 역년 2096년으로 망하자 진조선 유민들이 한반도 동남부로 남하하여 여러 나라를 세우고 이들은 남진한의 하나였던 사로(신라)로 통합되게 됩니다. BCE 57년 박혁거세가 신라를 개국하게 됩니다. 박혁거세는 고두막한의 딸 파소의 후손으로 추정됩니다.





2.

동방 한민족의 시원문화와 인류 상고역사의 실상을 밝혀주는 환단고기는 그 출간된 내력 속에서도 숱한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



환단고기를 감수한 해학 이기(1848~1909)는 전북 만경출생으로 실학을 연구, 유형원 정약용등의 학통을 계승하였다. 한 때 전봉준 장군과 거사를 도모했던 인물로 1894년 동학혁명 때 동학군을 이끌고 서울로 진격하려다 김개남의 반대로 구례에 있는 자택으로 돌아왔다.



1905년 포츠머스조약을 체결할 때 그는 한국의 처지를 호소하려고 나인영(나철, 1863~1916)과 미국에 가려 하였으나 일본공사의 방해로 가지 못하고, 그해 일본으로 가서 일왕과 정계 요인에게 한국 침략을 규탄하는 서면항의를 하였다. 그리고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귀국하여 한성사범학교에서 교편을 잡는 한편, 장지연 윤효정등과 대한자강회를 조직, 항일 운동과 민중계몽운동에 헌신하였다.



1907년 나인영, 오기호, 윤주찬, 김인식 등과 자신회를 조직하여 을사오적 암살을 계획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가고 이 일로 체포되어 7년의 유배형을 받고 진도로 귀양갔다. 출옥 후 민중계몽운동을 하다가 국세가 기울어지자 기유(1909)년 5월 25일, 절식으로 한 많은 일생을 마쳤다 (63세). 저서로는 해학유서 가 있으며, 1968년 독립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환단고기를 엮은 운초 계연수는 해학 이기의 문인으로 만주에서 독립운동단체인 천마대, 서로군정서, 의민사, 벽파대, 기원독립단 등에서 활동하던 중, 일본인 스파이에 의해 1920년 피살되었다. 묘향산 단군굴암에서 썼다고 하는 환단고기는, '대한독립단 부총재였던 청산리대첩의 영웅 홍범도와 정의부 총사령관이었던 오동진(1889~1930)양우兩友의 출금으로 출간'하였으며, 동방 창세 역사서의 출간에 대해 '우리 한사람 각자의 자아발견과 민족문화의 표출이념과 세계 인류의 공존이념을 위한 큰 축복의 성사'라고, 그 책의 범례에서 감개무량한 소감을 전하고 있다.



운초는 묘향산에서 "천부경"을 탑본하여 1917년 1월 10일 서울의 단군교당 앞으로 보냈는데, 단단학회 이유립(1907~1986)의 전언에 의하면 환단고기는 "다음 경신(1980)년이 되거든 세상에 내놓으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환단고기는 천마대 대장 최시흥에게 전해졌고 다시 서로군정서 이덕수를 거쳐 해방 후 평양의 기관지 태극 에서 활동하던 이유립에게 전해졌다. 이유립은 기관지 태극 에서 신탁통치반대론을 주장하다 일시 구속되었고, 이후 월남에 성공하여 1949년 봄 오형기 에게 정서를 위촉하였다.

 

환단고기 5개 사서 소장자와 합본 과정

삼성기 상 삼성기 하 단군세기 북부여기 태백일사
안함로 원동중 이암 범장 이맥
계연수 집안에서 전해 내려옴 백관묵(평북 태천의 진사) 백관묵, 이형식 이형식(삭주 이동의 진사) 이기
광무 15년 (신해, 1911) 5월에 운초 계연수가 위 5개 사서를 환단고기 1권으로 합본하고, 해학 이기가 교열하여 30권 한정본발간.

1949년 이유립이 월남하여 가져온 환단고기를 오형기에게 필사하게 함. 원본은 화재와 홍수로 분실.

1979년 조병윤이 이유립의 허가를 받지 않고 오형기의 필사본을 광고 이해사에서 100권 발행. 같은 해 배달의숙에서 오형기 필사본에 있는 오자 일부만 수정한 채 전형배 로 하여금 오형기의 발문을 재외한 100부를 영인 인쇄.

- 환단고기1 삼성기 (상생출판사 2009년 2월 7일판) 참고




3.

꼭 사서 보시기 바랍니다. 환단고기를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당연히 한권씩은 다 소장하고 공부해야 하는 책입니다. 아니 인류의 뿌리 역사가 담겨있기 때문에 전 인류가 공부를 해야되겠죠. 왜 미국의 하바드 대학교같은곳에서 환단고기를 연구하겠습니까? 그런데 환단고기를 이해하는데 쉽지 않을 꺼에요. 도움이 필요하시면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여기를 클릭하여 소책자 신청하시면 무료로 보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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