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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9.16 노론세력에 맞선 정조 이산의 개혁과 독살!
조선후기는 노론이 정국을 장악하고 있었다 군사는 노론의 사병이 다되었고 임금은 병권이없는 식물임금 이였다. 여기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이 바로 무사백동수와 정조 이산이다

백동수는 서얼 출신으로 무과에 합격한사람이지만 그는 무로서 문을 이룬 큰 사람이다.

백동수의 학문은 성취가대단하여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학자이면서 무인이 였다.

백동수가 정조로 하여금 장용영을 조직하자는 의견을 피력햇고 정조는 세손때부터 다짐해온 왕권 복귀에 이 장용영을 이용할 목적으로 무예도보서란는 개인 군사훈련교본을 편찬하게하고 그책무를 백동수에게 맡겠다. 백동수는 일반백성들은 무예를 익히려고 해도 무예교본이 없고 있어도 한문으로 되어있어 백성들이 고급무예를 익히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해 정조에게 건의해서 언문으로 그리고 그림으로 모든 동작을 설명 하게하여 쉽게 배우도록 하였다. 그 당시에는 직업군인이 되려면 무과에 급제를 하여 무관으로 나가는 것인데 고급 무서는 군벌들이 노출을 꺼려하여 일반에 내놓지 않으므로 일반백성이 무과에 합격하기란 매우 어려웠다. 백성들은 무예도보서를 보고 배워 무과에 합격하여 장용영에 들어감으로서 직업군인이 되므로 자연히 임금의 심복이 되는 것이다.

 

장용영에 군사로 뽑힌 사람들은 오직 실력으로 그곳에서 살아남아야 했다. 이는 장용영이라는 부대가 정조의 온 정성이 담긴 부대였기에 그만큼 새 세상에 대한 의지를 장용영에 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존의 오군영 군사들이 훈련받았던 것 몇 배 이상의 혹독한 훈련이 계속되었고, 강철은 두드려 맞으면 더 강해진다는 원리처럼 장용영 군사들은 특수부대로써 그 위용을 갖춰나갔다. 장용영 군사들이 익혔던 기본 무예는 원기(元技)라 하여 화포, 조총, 활쏘기였으며 이외에 별기(別技)인 창검무예를 따로 익혔다. 또한 선기대라는 장용영 정예기병의 경우는 좌초와 우초로 나눠 좌초는 말 위에서 재주를 부리며 적을 기만하는 마상재를 훈련하였고, 우초는 별기인 기창, 마상쌍검, 마상월도 등 실전에서 적의 예봉을 꺽는 기예를 훈련하였다. 이러한 훈련은 대부분 정조의 어명으로 편찬된 개인 전투무예서인 <무예도보서>에 실린 무예24기를 중심으로 이뤄졌다. 특히 한자를 모르는 군사들을 위하여 언해본을 따로 만들어 보급했기에 당시 누구나 <무예도보서>를 옆구리에 끼고 수련했을 정도였다.

 

정조는 어떻게 이 무예도보서 를 편찬 할 수 있었을까 그 이유는 그 당시 조선왕조는 왕권이 약하여 권신들의 힘이 왕보다 더 막강했다 영조가 무수리출신의 숙빈 최시의 소생으로 왕위에 오르자 그 당시 조정을 장악하고 있든 노론의 세력앞에서 왕으로서 제대로 정사를 펼칠 수 없는 것 이였다.

 

나라의 주요병권을 장악한 노론의 힘 앞에서 영조는 이름뿐인 군주로 정사는 노론에 의하여

농락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을 보다 못한 세자는 자신이 몸소 무예를 익히고 깨달아 무술서를 저술하였는바 이게 바로 무예도보통지서다 이 책을 저술한 세자가 일반백성들에게 전수하여 무예를 익히게 함으로서 자연스럽게 병권을 되찾을 심산 이였다 이것을 알아차린 노론의 세력들이 세자를 암살하려고 여러번 시도 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가고 대신 왕으로 하여금 자식을 죽이는 끔찍한 일을 공모했으니 그것이 바로 세자가 정신이 온전하지 못하여 별 미친 짓을 다하고 돌아다닌다는 누명을 씨워 뒤주 속에 가두어죽이게 만들었다.

 

이것을 정조가 세손으로 있을 당시부터 알고 있었다 그래서 우선 동궁의 호위군사인 이기사로 하여금 이 무술서를 토대로 훈련하게 하여 이기사가 동궁을 지키는데 만전을 기하게 하였다.후에 보위에 오른후 정조는 이 무예도보서를 언문과 그림으로 그려 일반백성들도 다 깨우치게 하여 무과를 보게 하였는데 거기서 배출된 자들을 장용영이라는 조직을 만들어 임금을 호위하는 친위대를 만들어 그당시 최고의 무인 백동수로 하여금 장용영을 맡겼다.

 

 

요줌으로치면 대대급 부대들로 편제하여 이중 보군은 능기군 과 십팔기군 으로 구분하였는데, 일 년 에 4번 시험을 봐서 실력이 떨어지고 게으른 군사들은 십팔기 군으로 강등시키고 성적이 우수한 자는 능기군 으로 뽑아서 무예 실력에 뛰어난 사람들에게는 특별히 번직을 줄여 주고, 급료를 높여주는 등 실력으로 승부하는 곳이 장용영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게 되었다. 당시 그들의 훈련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거의 매일같이 군사훈련이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매월 한 차례 단체 진법 훈련을 하였고, 3일마다 12명 단위인 대(隊)를 중심으로 돌아가며 활, 조총, 창검무예를 익혀야 했다. 또한 부대를 지휘하는 초관급 이상의 군관들은 단체로 모여 한 달에 3번씩 활쏘기 시험을 보아야 했으며, 장교인 지구관이나 교련관은 한달에 두 번씩 진법을 강론하게 하였다.

 

당시 장용영의 규율은 요즘의 해병대나 공수부대를 능가 할 정도로 대단하였다. 특히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근무 후에도 술을 먹고 행패를 부리거나, 도적질을 할 경우에는 정3품의 당상관이라 할지라도 강력한 처벌을 받아야만 했다. 그때도 요즘 군대처럼 행동강령이 있었는데, 그 중 몇 가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군사 기밀을 절대 노출하지 말 것, 함부로 백성들에게 곡물이나 돈을 수탈하지 말 것, 서로 간에 절대 싸우지 말 것, 남의 군장을 빌려 사용하지 말 것, 거리에서 술주정하지 말 것 등 장용영 군사로써 품위를 지키는 것을 생명으로 삼았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장용영의 힘은 막강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또한 이러한 군사 개개인 무예훈련 뿐만 아니라 단체로 펼치는 진법 훈련 또한 장용영은 최고의 실력을 나타내었다. 특히 정조는 당시 중앙군영인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 등과 장용영 군을 한꺼번에 합동군사훈련을 시키기도 하였는데, 각 군영 대장이 다른 군영을 지휘해보도록 해서 장용영 군사들의 능력을 다른 군영대장들에게 확실히 인식시켜줬다. 보통 진법은 넓은 공간이 필요했는데, 한강가의 노량진을 비롯한 모래사장은 최고의 군사 훈련 터 로 손색이 없었다. 노량진에 모인 장용영 군사들은 군관의 수기에 맞춰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예진, 곡진, 방진, 직진, 봉둔 진 등 다양한 진법을 정조 앞에서 펼쳐 보였다. 또한 기마병인 선기대의 경우는 특별히 학익진(鶴翼陣)과 봉둔 진(蜂屯陣)을 중심으로 훈련하였으며 보병과의 연합진법인 오행진(五行陣), 현무진(玄武陣) 그리고 가장 화려한 육화진(六花陣) 등을 익혔다. 이런 대규모 연합진을 정조시대 에는 의무적으로 매월 10일마다 익혔으니 그들의 전술 감각은 당대 최고였을 것이다.

 

이렇듯 정조의 눈앞에서 신세계를 건설할 군사들이 정교한 군사훈련을 펼치는 모습을 보고 왕권을 되찾았다는 자신감으로 정조는 아마도 기쁨의 눈물을 흘렸을지도 모른다. 특히 수원 화성을 완성하고 아버지 사도세자(훗날 장조로 추존)의 묘소에 참배하러 와서 펼친 야간군사훈련은 그 자체로 척신들의 간담을 서늘케 했었다. 그러나 그 기쁨의 눈물도 잠시, 정조는 1800년 5월 30일, 강력해진 장용영의 군세를 믿고 남인을 중용하겠다는 취지의 ‘오회연교(五晦筵敎)’ 발언을 하고 불과 한 달이 못 되어 급서한다. 이 발언은 ‘부친인 사도세자를 죽인 노론을 결코 용서할 수 없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이제 노론의 나라가 아닌 백성을 위한 나라를 만들겠다고 두 주먹을 불끈 쥔 정조는 한스럽게 가을날 떨어지는 낙엽처럼 나는 간다라는 소리도 남기지 못하고 그해 6월 28일 어린 순조만을 세상에 남기고 덧없이 떠났다. 병권이 없는 군주는 더 이상 왕 노릇을 할 수없다는 것을 절실히 보여주는 진리이다. 만약에 정조가 막강한 군대를 장악하고 있었다면 감히 왕을 독살하려는 시도 자체를 못하였을 것이다. 정조가 남인을 중용하고 노론을 용서하지 않겠다는 속내를 비친이상 노론은 가만히 있을 수 없기에 마침 정조가 몸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내의원 의원을시켜 독살한 것이다 당시 내의원의 최고책임자는 좌의정 심환지 그는 정적관계에 있던 노론 강경파의 영수였다. 심환지의 추천으로 내의원에 들어온 의원 심현은 24일에서 26일까지 사흘간 정조에게 연훈방 치료를 한다. 연훈방자체가 극독으로 변하게 하는 조치를 하여 독살한것 연훈방 치료를 받은 후 일시적으로 호전되는 듯 했다. 그러나 사흘째 연훈방 치료를 받은 26일 저녁부터 의식이 혼미해져 갔다. 여러 노력이 이어졌지만 정조의 의식은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6월28일 정조는 끝내 숨지고 만다. 정조는 숱한 의문을 남긴채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그의 죽음은 향후 조선 역사에 커다란 분수령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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