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산 또는 강증산으로 불렸다. 아버지는 흥주(興周)이다. 학문적인 소질이 있었으나 경제적 빈곤 때문에 일찍 학업을
중단하였다. 동학농민운동 후에 나타난 사회적 혼란과 참상을 보고서 인간과 세상을 구원할 새로운 종교를 세울
결심을 하게 된 그는 이러한 혼란에서 벗어나는 길은 기성 종교나 인간의 능력으로는 할 수 없으며 오직 하늘과
땅의 질서를 근본적으로 뜯어고치는 방법밖에는 없다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유·불·선(儒·佛·仙) 등 기성종교의
교리와 음양(陰陽)·풍수(風水)·복서(卜筮)·의술(醫術) 등을 연구하는 한편 신명(神明)을 울리는 도술과 과거·미래
를 알 수 있는 공부를 하였다. 또한 1897년부터 3년간은 세상을 더 널리 알기 위하여 전국을 돌아다녔는데, 이 기
간에 충청도 비인(庇仁) 사람인 김경흔으로부터 증산교의 중요한 주문(呪文)이 된 태을주(太乙呪)를 얻었으며, 연
산(連山)에서는 당시 《정역(正易)》을 저술한 김일부(金一夫)를 만나 정역에 관한 지식을 얻게 되었다. 1901년
모악산의 대원사에서 수도중 하늘과 땅의 원리를 깨닫고 인간의 욕심·음란·성냄·어리석음의 4가지를 극복함으로
써 성도(成道)하게 된 후, 1902년부터 7년간 모악산 근방을 중심으로 포교활동을 하였다. 그는 자신이 세운 종교
를 <만고(萬古)에 없는 무극대도(無極大道)>라고만 하였을 뿐, 증산교라는 명칭은 훗날 그의 호를 따서 붙인 것
이다. 한때 의병모의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석방되기도 했다. 증산은 1909년 갑자기 자신의 죽음을 미리 예고하여
사방에 흩어져 있던 추종자들을 모이게 한 뒤 세상에 있는 모든 병을 대속(代贖)하고 죽었다. 그가 죽은 뒤 추종
자 몇 사람이 남아 장례식을 치렀는데 그 뒤 교단(敎團)은 다시 부흥하여 민족항일기에는 한때 600만 신도를 가진
보천교(普天敎) 등으로 계승되었으며 오늘날에는 수십 개의 교파로 이어져 오고 있다. 후천세계(後天世界)에 관
해서 예언한 《현무경(玄武經)》을 남겼다. 증산교에서는 교단의 창시자일 뿐 아니라 신앙의 대상이기도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