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진산 봉화대는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시대부터 외적의 침입을 알 리는 통신수단으로 이용되어 왔다.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조 세종4년(1422년)에는 봉수제도가 정비되어 5등급 5개의 직봉 망진산 봉수대는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시대부터 외적의 침입을 알리는 통신수단으로 이용되어 왔다.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조 세종4년(1422년)에는 봉화제도가 정비되어 5등급 5개의 직봉 노선을 거쳐 한양의 목멱산(남산)으로 연결시켜 운용되었다.그러나 1895년 봉수제도가 폐지되어 기능이 완전 상실되었고, 일제 침 략시에는 봉수대가 완전파괴 훼손시켜 역사적 사실을 파묻어 버렸다.
그러다가 광복 50주년인 1995년 『진주문화 사랑모임』을 비롯한 민간단체와 시민의 참여로 6,500여 만원의 성금을 모아 복원에 성공하였다.망진산 봉수대 복원은 민족통일의 염원을 담고 이루어진 것이므로 백두산, 한라산, 지리산, 독도, 진주 월아산의 돌을 모아 기단에 심었고, 금강산 돌은 통일이 되는 그 날 가져다 심기로 하였다 한다.
봉수대 복원 취지문가야인의 숨결이 서린 땅, 수많은 성이 흙담처럼 무너져 내리던 임란에 진주성의 횃 불은 꺼질 줄 몰라 온 조선을 공그어 받치던 곳이었어라.
그러나 뉘 알았으랴. 나약한 왕권아래 외침을 알리던 진주의 망진산 봉화대 불 꺼지고, 일제의 병탄아래 봉화대 가깡그리 무너지고, 못난 정치의 시대 전도된 역사의식은 망진 산 봉화대를 역사의 뒤뜰에다 매몰시킨 채 망각의 세월이 어언 100년을 헤아리게 될 줄이야.
그래도 진주는 역시 진주 아니던가. 한줄기 맑은 샘물처럼, 한자락 맑은 바람처럼, 한 줄기 밝은 햇살처럼 사는 사람들이 있어 건너 띈 세월의 뒤안에 파묻힌 망진산 봉화 대의 역사적 사실을 파내어 흙을 털고 때를 벗기어 이곳에 다시 세우게 되었으니 망 진산 봉화대의 그 역사와 복원과정을 여기 적는다.
일반적으로는 봉화대는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시대부터 외적의 침입을 알리는 통신 수단으로 이용되어 왔다.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조 세종 4년(1422년)에는 봉수제도가 정 비되어 5등급, 5개의 직봉 노선을 거쳐 한양의 목멱산(남산)으로 연결시켜 운용하였다.
진주의 망진산 봉화대는 조선시대에 돌과 흙을 섞어서 만들어진 것으로 전하며, 위에 말한 5개 직봉 노선 가운데 동래 다대포진에서 목멱산에 이르는 제2노선의 보조노선 (간봉)으로서 남해 금산-사천 안점의 봉수를 받아 진주시 명석면 광제산 봉화대로 이 어 주는 곳이었다.
그러나 1895년 전국의 봉화제를 폐지하면서 망진산 봉화대도 기능 을 잃었으나 1894년 동학농민항쟁과 1919년 3·1만세운동을 벌일 때 망진산 봉수대를 사용한 것으로 전하며, 그 뒤 일제는 전국의 봉화대를 파괴하거나 훼손하여 역사적 사 실을 파묻었고, 우리 민족 또한 망각의 세월을 살았다 이제부터 봉수대라 고처부르겠다
.
그러다가 광복 50년인 1995년 통일 기원 전국봉화제의 일환으로 진주문화사랑모임을 비롯한 민간단체가 중심이 되어 망진산 봉화제를 올렸고, 다시 망진산 봉수대를 복원하 기 위한 시민운동을 펼쳐 봉수대복원추진위원회가 구성되고 2천여명의 시민이 참여하 여 6천5백21만5천원(1구좌 5천원)의 성금을 모았으며, 문화재전문위원들의 감수와 고증 을 거쳐 봉수대모형을 확정지어 다시 세우게 되었다.
망진산 봉수대복원이 갖는 의미는 우리 진주사람들의 올바른 역사의식을 달구어 벼르는 일이며, 새로운 진주의 역사를 창조하는 일이라는 점이다. 또 애초에 망진산 봉수대 복원은 민족통일의 염원을 담고 이루어진 것이므로 백두산 돌과 한라산 돌, 지리산 돌, 독도의 돌, 진주의 월아산 돌을 모아 기단에 심었고, 금강산 돌은 통일이 되는 그날 가 져다 심기로 하였다.
그러므로 망진산 봉수대는 우리 진주사람들의 통일염원을 담은 소도이며, 역사인식의 가늠대이며, 문화사랑의 척도가 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