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은 박익 선생 어떤 인물
1출생과 성장
평범하게 살아간 한 개인의 삶에 대해서도 어려운 시기 그의 삶의 모습을 평가의 잣대로 삼지만, 특히 국정에 책임을 지고 있는 조정 관료들의 삶과 행동방식에 대한 잘잘못은 격동기의 대응방식을 통해 평가하기 마련이다.
松隱 朴翊 송은 박익 선생은 고려 멸망과 조선건국이라는 격동기에 자신이 몸담고있던 왕조를 지키려다 그것이 여의치 않자 낙향하여 은거의 삶을 살면서 충절을 다한 양심적 지식인이라 평가할 수 있다.
고려말 8은[隱]의 한사람이요, 두문동72현,으로 전해지고 있는 박익선생은 [1332~1398]은 초명은 천익이고 자를 태희 호를 송은이라 했으며, 본관은 밀성이다.
아버지는 판도판서를 역임한 朴英均이며 어머니는 능성구씨다. 박익선생이 태어나서 성장한 밀양지역은 신라 경덕왕대에 密城府으로 개편된 이래, 고려시대에는 그 군세가 더욱 확장되어, 主邑 으로서 인근의 창녕군과 청도군 현풍, 桂城.靈山.豊角 등을 屬邑 속읍 으로 거느리고 있었다. 즉 밀성군에만 수령인 知部事가 파견되어 속읍 6개의 군현을 통제하고 있었다.
물론 이들 속읍 가운데 몇 개의 군현은 뒤에 현령이 파견되거나 주읍으로 승격됨으로써 고려말까지 밀성군의 속읍으로 남아 있지는 않았다. 예컨대 청도군은 감무가 파견되었다가 충혜왕 후4년 주읍으로 승격었으며, 창녕군은 명종 2년에 감무가 파견되었다 영산현의 경우는
고종 15년에 감무가 파견되었고, 현풍현의 경우는 공양왕 2년에 감무가 파견되어 밀양의
구지산부곡을 이곳에 移屬하였다.
이처럼 대읍으로 읍세를 유지하고 있던 밀성군은 무인 집권기 이래로 농민항쟁 몽고침입 삼별초항쟁을 겪으면서 지역사회가 변화하고 있었다. 항쟁의 중심에 있었다는 사실은 중앙 정부로부터 한층 통제의 대상이 됨으로써 지역사회가 위축 되고 내적 갈등을 유발할 소지도 갖는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지역주민의 상호비판과 결속을통해 지역사회의 건강성을 유지 하고 역동성을 보일 수 있는 양면적 속성을 지닐 수 있다. 또 밀양의 민주화의 의식은 고려무인시대의 무인집권의 비판으로 유명한 시가 전하여 내려온다.
그시한구절은 이러하다
산이 많은 이 고을에 주경도 많아 유명한 소문 한 지방에 드높아라.
지세가 영험하니 인물도 걸출하고 평야도 비옥하여 해마다 풍년일세
도로가 이어져 배 수레 모이며 미풍이 남아 있어 예의 밝은 고을이네.
선비들 많기로는 蜀郡과 같고 빼어난 경치는 餘杭보다 으뜸이라네.
위의 시는 무인 집권기 비판적 지식인의 한 사람이었던 임춘이 당시 유랑 하면서
밀양을 방문하여 목격한 것을 시로 표현한 것이다.
이시에서 밀양이 중국의 초항보다도 더 아름답다고 했다.
박익선선생은 이와같은 입지조건을 갖춘 곳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던 것이다.
물론 송은선생은 밀양이 아니라 다른지역 특히 수도인 개경에서 태어났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족보나 黃喜황희가 지은 墓表에 따르면 아버지 박영균 판도판서를 할아버지 박간은 평장사를 역임하였다 하여 일찍부터 고위관료를 배출한집안이 도성에 터전을 마련하고 살고있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박익선생은 도성부근이나 아니면 도성그안에서 태어날 수 도 있는 것이다.
박익선생은 어린 시절과 청년기를 원간섭기라는 사회현실 속에서 보냈다 고려가 장기간에 걸친 몽고와의 전쟁 끝에 원에 종속된 지 꼭50년이 경과하고 있었던 충숙왕 복위년 [1332]에 태어나 공민왕 5년[1356] 반원정치로 원의 간섭이 종식되는 25세까지 원나라간섭기를 보냈던 것이다.
박익이 당시 관료생활을 준비하고 있던 당시 중앙정계는 원의 종속구조가 자리잡게 되면서 중서문하성 -6부체제로 유지되어 왔던 정치기구 자체가 僉議府-4司체제로 개편되어 원의 예속화 정책을 수용하는 방향으로 전환됨으로서 기형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었으며 都兵馬使에서 개편된 도평의사사 가 본래의 제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었다 정치운영 역시 정규적인 관부와 여기에 소속된 관료 중심으로 이루어지기 보다는 왕권의 유지와 강화라는 정치적 목표에 부응하는 측근세력과 측근정치기구 중심으로 운영되는 이른바 측근정치의 형태를 보이고 있었다 나아가 원의 종속화 정책을 수행하는 매국집단이 주요권력기관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럼으로 나라꼴은 말이 아니었다 부원세력과 왕의세력 두세력간의 암중 투쟁역시 극에달하고 있었다 백성들의 굶주림은 말할나위도 없었다. 이러한때를 박익은 청년기를 맞이하였던 것이다.
2 관료 진출과 정치활동
우리 역사상에 충절이라고 하면 고려말 충신으로 포은․목은․야은 3은을 꼽을 수 있다. 그러나 이분들 못지않게 고려말 두문동72현으로 3은과 함께 8은으로 일컫는 송은 박익(松隱 朴翊)선생은 밀양이 낳은 고려말 충신이다. 고려가 망한 뒤 세종때 와서 정인지가 고려사를 편찬했으나 전체가 왜곡되고 특히 고려말년사는 어긋남이 지나쳐서 그 진실이 가리워져 오고 있다.
역사는 민족의 전통이며 시공을 초월한 영원한 진리요 철학이다. 살아있는 역사만이 소명의식을 형성하는 소인(素因)이 된다고 했다. 고려사의 왜곡에서 왕위찬탈사와 새 왕조건국의 비사는 오랫동안 묻혀 왔으나 사람의 입에는 모조리 재갈을 물릴 수 없는 것처럼 여말충신 원천석(元天錫)에 의해 그 불의가 전해져서 백일하에 드러났다.
송은 박익 선생은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는 대변혁기에 충과 의로써 포은․목은 등과 교유하면서 고려사직이 기울어지는 망국을 한탄하고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개로써 대쪽같은 삶을 지킨 선비로 여말충신일사에 전해 내려온다.
선생의 호는 송은(松隱), 자는 태시(太始), 초명은 천익(天翊)이다. 본관이 밀성이므로 밀성대군의 후손이며, 범박씨의 대종손이기도 하다. 고려 충숙왕 원년(1332.7.27) 밀양 삽포리제에서 판도판서 은산부원군 문헌공 영균(永均)의 큰아들로 태어났다. 천성이 순진하고 기개가 영걸하며 효성이 지극했다. 성장하면서 학문에 뜻을 세워 정충(貞忠)과 정학(正學)이 일월처럼 밝았으며 정주학을 궁행하여 특히 포은․목은과 더불어 도의로 친교가 두터웠다고 두문동서원지에 기록돼 있다.
송은 선생은 고려 공민왕 때 과거에 급제 동경판관, 한림문학, 소감, 예부시랑중서령 세자이부를 겸했고 예판을 지냈다. 조선건국전 이성계를 따라 왜구와 변방의 오랑케들을 평정하는 등 장상의 기절을 갖춘 분이었다. 고려의 운이 다하자 슬픈 마음을 품고 망복제현들과 불조현에 조복과 관대를 벗어 걸고 송현에 은거하여 스스로 장님이라 칭하고 살다가 드디어 고려가 망하자 제현들과 눈물로 작별하고 밀양부북면송계 고향으로 돌아와 스스로 호를 송은이라 하고 시를 지어 이르기를 "참된 정성 몇 번이나 구름 멀리 천리를 바라보았나, 피눈물 헛되이 새벽 달빛 속에 흐르네. 곁사람은 흥망사를 묻지마소, 물에 놀고 산에 놀면 일생이 족하리"라고 읊어 선생은 일편단심을 토로했다.
포은이 죽기를 맹세하던 날 송은을 불러 포은은 이렇게 말했다.
"사는 것은 임시요 죽는 것은 영원한 것이니 비록 천운이라 하나 홀로 죽어서 우리 임금 계시는 뜰에 돌아갈 것이다. 오직 내 마음을 아는 이는 송은, 목은, 야은 이니라"하였다. 송은 또한 포은을 붙잡고 울면서 "나 또한 이씨의 곡식을 맹세코 먹지 않겠노라"고 했다.
포은이 순절하자 제문을 지어 이르기를 "대부는 의로서 불사이군의 충성을 지켰도다. 고향에 반장하니 그 무덤 태양처럼 빛나다"라고 했다.
태조3년(1394) 이태조가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고 선생을 회유하여 공조, 예조, 형조, 이조판서 등 네 차례나 초빙했으나 모두 거절했다. 태조5년에는 좌의정의 교지를 받들고 양촌권근(陽村權近)이 송은을 찾아왔으나 역시 귀머거리요 소경이라 자칭하고 왕명을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양촌은 헛걸음을 치고 태조에게 "송은은 왕의 뜻을 소중하게 생각하지만 죽음을 삶같이 여기니 신은 그를 오게 할 수 없었습니다"라고 복명했다. 이때 송은선생은 두견시를 지어 이렇게 읊었다.
"촉나라의 존망이 너에게 있음이 아니거늘 피를 토하는 울음소리는 누구의 원수를 갚으려느냐 하늘 높고 땅은 넓어도 앞날이 막막한 나그네요 달은 지고 꽃도 떨어지니 근심만 적막하네"
이때 이태조는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면서 선생의 불사이군의 충절을 이해하고 "어찌 왕씨의 충노를 허물하겠는가"하며 관용하고 논죄하지 않았다.
이태조 7년(1398) 11월26일 선생이 운명하던 전날 밤에 네 아들 융, 소, 조, 총을 불러놓고 유서를 보이며 이르기를 "나는 왕씨의 혼으로 돌아가나 너희는 이씨의 세상에 있다. 이미 남의 신하가 되었으면 충성으로 힘을 다하라. 선천(先天)과 후천(後天)이 부자가 서로 때가 다르니라" 했다. 이튿날 선생은 삽포리제에서 향년67세로 운명했다.
조정에서는 송은 선생을 '보국숭록대부 의정부좌의정 겸 경문춘추관 홍문관 관상감사'로 증직시키고 1399년 밀양출신 변춘정의 청시호에 의해 '충숙공(忠肅公)'의 시호를 내렸다. 훗날 정종은 선생의 충절을 높이 평가하여 사제문을 보내 제사토록 했다.
뒤에 황희가 지은 선생의 묘표에 "갓을 불조현에 걸고 저 학소산으로 올라가 고사리를 케어 먹고 이조에 곡식도 먹지 않았으니 어찌 백이숙제의 충절이 아니며 또 어찌 나라에 드문 충향이 아니겠는가"하고 선생의 지극한 충절을 존중했으니 당대의 선생이 어떤 분이였던가를 짐작해 볼 수가 있다.
지금 전해오는 송은 선생 문집에는 포은, 목은, 야은, 도은, 변춘정․ 중량 등 당대 명사들과 화주한 시들과 잠송2칙.입지잠, 지신잠, 유서 등이 실려 있는데 선생이 끼친 글 속에는 그의 푸른 뜻과 높은 기개와 굳은 지절(志節)이 담겨 있어 어찌 구태여 문품의 수향이 많기를 탐할 것인가!하고 노산 이은상 선생은 송은선생 문집국역서문에 그렇게 적었다. 선생의 시는 한결같이 청랑고고(淸朗孤高)하며 여말의 세도인심의 험난한 것이 싫어서 이미 산 속에 숨어살 뜻을 나타내고 있음을 포은․목은 등과의 중답시에서 알아 볼 수 있다.
3박익선생의 삶의 흔적
청도면 소고리 뒷산 화악산 자락에는 송은선생의 묘소가 있고 그 아래 보본재(報本齎)는 선생의 치제소이며, 입구에는 선생의 신도비가 서 있다. 1833년(순조33) 초동면 신월리에 덕남서원과 사우를 창건 충숙공 송은 선생을 주벽으로 봉안하고 우당박융(憂堂朴融:맏아들)과 인당박소(忍堂朴昭:둘째아들)의 삼부자선생을 봉안하여 향사를 치러오던 중 고종10년 대원군의 서원 훼철령에 따라 건물이 철거되자 영정을 별조에 이안했다. 그 후 1933년 초동면 신호리 모선정(募先亭:경상남도지정 문화재자료 제285호) 경내․ 후편에 영정각을 신축하고 영정 이안과 동시에 사림(士林)의 공의로서 춘추향사를 받들고 있다가 1989년 덕남사로 현액하였다. 이 밖에 청도군 이서면 용강서원과 산청군 신안면 신계서원, 개성 두문서원, 장성경현사, 거제 동부면 송영각 등에 선생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최근에 고려역사선양회에서 경기도 파주시에 건립하고 있는 고려통일대전에 송은 선생의 위패가 봉안되었고 초동면 신호리 모선정에 보관중인 박익 선생의 유고 시문집 책판은 경상남도지정 유형문화재 제351호로 지정되었다.
2000년 9월 태풍으로 인해 송은 선생의 묘소 봉분이 침하 되었는데 문중회의를 소집하고 보수작업을 하던 중 봉토하에서 연하문이 새겨진 화문석이 발견됐다.
이를 문화재당국에 신고했다. 곧이어 문화재 전문위원들과 각 대학의 고고학 전문교수와 일본․중국 등 고고학계에서 현지조사를 했다. 내부를 조사해 본 결과 석상은 화강암 판석으로 잘 다듬어 조립한 석실과 그 내부상벽에 벽화가 선명하게 그려져 있는 것이 확인됐다. 문화재청에서는 그 중요성을 인정 동아대학교 박물관에 의뢰 석실내부 벽화를 정밀조사토록 했다. 당국은 예산조치와 동시 국가문화재로 가지정했다.
조사결과 출토유물은 석실 외부에서 은수저1벌, 황송통보(송 인종 보원2년:1039년), 홍무통보(명 태조:1368~1398) 9개가 출토되고 봉분외각 암판에서 분청사기 사발1점과 병풍석 아래에서 옹형의 녹유토기 1점 등 16점이 발견됐다.
석실내부의 벽화내용은 4인 1조를 이루면서 북쪽으로 이동하는 행렬과 매죽화를 가장자리에 첨가 배치 벽화상호간의 대칭 관계와 백묘화기법 등은 당시의 회화사 연구에 획기적인 자료하고 평가된다. 충절을 의미하는 뜻으로 추정하는 세한삼우(歲寒三友 : 松, 竹 , 梅)의 고분 내 발견은 고려태조 왕건묘의 전통을 잇는 것으로 고고학적으로 매우 주목되고 있다.
후손들은 1997~2000년(3년)에 걸쳐 선생의 600주기 추모사업을 대대적적으로 추진하여 송은선생문집 국역 등 각종사업을 마무리 했다.
문화재청은 2000년 벽화발굴 후 근4년에 걸친 조사보고 심의증을 거쳐서 2004년 12월 '사적' 지정예고 한 후 2005년 2월 '밀양고법리박익벽화묘'를 국가지정문화재(사적)제459호로 지정했다. 송은박익선생은 절의신으로 밀양읍지에 기록돼 있고 국가지정 문화재로는 밀양에서 유일한 사적이다. 전 국민의 보호관리가 요청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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