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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진짜역사 | Posted by 졸당16세 2010. 11. 24. 16:11

졸당공 박총

일가 만파의 대종친의 장자 밀성대군의 9세 시조45세 총(聰1353-1439)

송은공(松隱公) 박익선생의 넷째 아드님이시다. 초명은 명옹(暝翁) 호는 졸당(拙堂). 포은 정몽주의 문인이다. 송은공의 아들4 형제분이 다 같이 포은의 문인 이였는데 모두 학문이 깊고 학행이 있어 세상사람들이 사우당(四友堂)이라고 불렀다. 야은 길재․ 춘정 변계량․ 독곡 성석린 과 서로 도의와 학문이 통하여 교유하며 지내셨다. 태종조에 효행으로 천거를 받아 관직이 호조정랑(戶曹正郞) 에 오르시다. 만년에 벼슬을 버리고 삼가현 대평 송지촌(현 합천군 대병면 성내리)에 이거하여 살았다. 공이 별세하신 후에 나라에서 이조참판의 벼슬을 증직하였다. 신심신관편(愼心愼官篇) 의 저술이 있고 형 아당이 남긴 글과 졸당공의 시문을 합하여 1916년 연방록(聯芳錄) 이 간행되어 후손에 전한다. 호조정랑으로 있을 때 권세에 아첨하지 아니하고 바른말을 잘하므로 권력층(權貴)의 미움을 사서 귀양사리를 하셨다. 유배 시에 시를 지어 읊기를 “꿈에 번연이 임금을 뵈었더니 깨고 나니 강기슭에 누어 있구나. 신하되어 벼슬의 높고 낮음을 말하지 말라. 타고난 천성이야 누군들 임을 그리는 마음 없을 소냐”(一夢飜然寶袞臨 覺來方識臥江深 家臣莫說官崇庳 天賦誰無戀主心)한 것은 임금에 대한 충절이 잘 표현 된 것으로 후세사람들이 범육장(范六丈)의 퇴우(退憂)[8]에 비유하였다. 만년에 송지촌에 옥산정(玉山亭) 을 짓고 당대의 석학(碩學)들과 교류하셨는데 옥산정은 지금 그 빈터만 남아있고 유허비만 세워져있다. 고려 공민왕 2년(1353)에 태어나시어 세종 21년(1439) 87세를 일기로 세상을 뜨셨다. 묘는 합천군 용주면 봉기리 미금동에 있으며 사대석(莎臺石)이 있고 허유(許愈) 가 찬한 묘비와 이헌주(李憲柱) 가 지은 유허비명(遺墟碑銘)이 있다. 헌종 5년 기해(1839년)에 단계 신계서원 에 배향되었다. 배는 정부인(貞夫人) 동래정씨로 아버지는 정침(鄭琛)이며 묘를 잃어버렸다. 후배 정부인 강양 이씨는 아버지가 이공실(李公實)이며 조(祖)는 강양군 이약(江陽君 李若)으로 묘소는 공의 묘 오른 쪽 위에 있다.

 

승문(承文)과 희문(熙文) 두 아드님과 강위성(姜渭成)과 훈도(訓導)를 지낸 이석주(李碩柱)에게 시집간 두 딸이 있다.

 

●졸당(拙堂)공의 형제

 

☆ 9세(45세) (朴融1347 - 1424)

 

송은공의 큰아드님. 자는 유명(惟明) 호는 우당(憂堂). 정포은의 문인. 문과로 전한(典翰) 함안군수(咸安郡守)를 역임하였다. 이조정랑(吏曹正郞)에 이르렀으며 청백리(淸白吏)였다. 순조 계사년에 덕남서원에 배향됨. 덕행과 기절(氣節)이 있어 왕을 보필할 재목으로(王佐之材) 꼽히였다. 배는 숙인 아산(牙山) 장씨(蔣氏)이며 묘는 양위 분 모두 실전(失傳)되어 송은공 묘소 왼쪽 아래에 제단을 별도로 설치하여 제향(祭香)을 드리고 있다.

 

외 아드님 건(乾)과 사위는 贈 左相을 지낸 안돈후(安敦厚)와 참지(參知)를 지낸 김유장(金有章)이다.

 

☆ 9세(45세) (朴昭1347 - 1426)

 

송은공의 둘째 아드님. 자는 해옹(晦翁). 호는 인당(忍堂). 정포은의 문인. 생원으로 안음현감(安陰縣監)을 지냈으며 청백비(淸白碑)가 세워져있다. 계사년에 덕남서원에 배향 되었다. 배는 의인(宜人) 평양 조씨(平襄趙氏)이며 아버지는 이상(貳相)을 지낸 조홍(趙洪)이다. 후배는 의인(宜人) 창원공씨(孔氏)로 아버지는 부정(副正)을 지낸 공인기(孔麟起)이다. 양위분 묘가 실전(失傳)되어 송은공 묘소 왼쪽 아래에 단을 별도로 설치하여 제향을 모시고 있다.

 

감찰을 지낸 맹번(盟蕃)과 진위부위(進義副尉)를 지낸 중번(仲蕃)과 부호군(副護軍)을 지낸 계번(季蕃) 세 아드님과 배정비(裴廷斐)에게 시집간 딸이 있다.

 

☆ 9세 (朴調1350 - 1431)

 

송은공의 셋째아드님. 자는 신옹(愼翁) 호는 아당(啞堂). 정포은의 문인으로 조예(造詣)가 高明하여 문하생 가운데 촉망을 받았다. 일찌기 자관시(自寬詩) 에“ 天心은 厚薄이 없으니 陋巷이라도 陽春이로다”라고 하였는데 변춘정이 보고 칭찬을 금치 못하였다고 한다. 진사에 합격하여 효로 추천되어 예조정랑에 등용되었다. 만년에 산수를 사랑하여 동생 졸당과 낙동강 오른쪽 에 복거(卜居)하였다. 壽 82세였다. 기해년에 신계서원에 배향 되었다. 진양군 속사리(束沙里)에 제단이 설치되어있다. 배는 공인(恭人) 광산김씨(光山金氏)이며 아버지는 김지택(金之澤)이다. 묘는 진양군 집현면 장흥리 수의곡(繡衣谷) 계좌이다. 예조정랑을 지낸 흥문(興文)과 생원으로 등제한 두문(斗文) 기문(起文) 세 아드님을 두셨다.

 

▷송은선생 묘지석에는 휘가 흔(昕)으로 기록 되어있다.

 

[관련주]

 

[1]▶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1337 - 1392)

 

고려말의 충신. 시호는 문충(文忠). 본관은 영일. 고려에 충절을 다하여 피살 됨.

 

[2]▶곡 성석린(獨谷 成石麟1338-1423)

 

자는 자수(自修). 호는 독곡(獨谷.) 시호는 문경(文景). 본관은 창령. 1357년 과거 에 급제하여 벼슬이 성균관 사성(司成) ․지신사(知申事)․동지사사(同知司事)․ 정당 문학(政堂文學)․관찰사(觀察使)에 이르고 왜구를 격퇴한 전공으로 공신이 되었다. 의창(義倉)을 설치하였다.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개국하여 개국공신이 되 었다. 후에 영의정이 되었고 시문에 능하며 명필로도 이름이 높았다.

 

[3]▶태종(太宗)

 

조선의 제 3대임금 .휘는 방원(芳遠). 태조 이성계의 다섯째아들. 조선개국에 공이 있으며 두 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에 이어 왕위에 올랐다. 배불숭유(排佛崇儒)정책 과 관제의 개편, 호패법실시 등으로 조선 중앙통치 기반을 마련하였다.

 

 

호조정랑(戶曹正郞)

호조에 소속된 정5품의 관리. 호조는 국가의 재정과 회계. 경비의 지출 등 맡은 6 조의 관청이다.

 

[5]▶삼가현(三嘉縣)

 

경상남도 합천군에 소속된 행정구역 지명. 삼기(三岐)와 가수(嘉樹) 두 현을 합 한 고을이다. 조선 태종 때 현감을 두었다. 1895년 군으로 승격하였다. 1914년 일부는(神院과 栗院) 거창(居昌)으로 편입되고 나머지는 합천군에 소속되었다.

 

 

[6]☆신관 신심 편(愼官愼心編)

 

 

『사람이 세상에 살아감에 있어서 벼슬하지 못한 자는 비록 걱정이나 마음은 반드시 편할 것이요. 이미 벼슬한자는 비록 기쁘다해도 마음은 반드시 걱정일 것이다. 벼슬아치가 되어 백성을 다스릴 때엔 마음은 굳게 잡을 만하다. 벼슬이 있으면서 욕심을 줄이지 않으면 반드시 천성을 상실할 것이니 어찌 두렵지 안으랴! 벼슬이 높으면 위태롭고 낮으면 편안하다. 위태함과 편안함이 비록 다르지만 그 실상은 하나의 이치이다 위태함을 알면서 깨닫지 못하면 반드시 험한 길에 빠지고 편안함을 알고 깨달으면 가히 족함을 안다 하리라. 무릇 녹봉은 마땅히 절용(節用)하여 가벼이 쓰지 말아야 한다. 마음껏 맡은 일에 몸 바치고 지극히 청렴하고 지극히 근면할 것이니 청렴하면 사람들이 복종하고 근면하면 일이 잘 될 것이다. 무릇 벼슬이 있는 자는 어찌 털끝 만한 비리(非理)라도 그 사이에 작용 시켜 나의 본심을 어기리요. 공무에 몸 바쳐 직책을 다한 뒤에야 가히 벼슬과 녹의 위태함을 면할 것이니 내 본심의 덕을 온전히 하리라. 조심할 지어다! 조심할지어다!』

 

[7]☆연방실기(聯芳實記)

 

연방실기는 송은 선생의 네 아들가운데 끝인 아당과 졸당 양 형제분의 시문을 모아 1916년에 간행한 것이다. 상․하 두 권으로 구성되어 있고 장석영(張錫英)이 서문을 썼다.

 

상권은 아당선생 편으로 「자관(自寬)」을 비롯한 한시 14수(15)와 만장 2수, 제문이 실려있고 부록과 가장․행장․유사(遺事)․단갈명(壇碣銘)이 있다. 하권은 졸당 선생 편으로 「적거자회(適居自懷)」를 비롯한 한시 16수(20)와 文으로 신관신심편(愼官 愼心編)이 있다. 그 외 부록으로 가장(家狀)․행장(行狀)․묘갈명․봉산재기(鳳山齋記)․ 봉산재상량문․옥산정유허실기․옥산정유허비기․후지(後識)로 되어있다.

 

1992년 국역 연방실기를 간행하면서 아당편(상)에 물언재기(勿言齋記), 물언재이건기, 물언재이건상량문을 보완하여 싣고 졸당편(하)에는 졸당선생유허비명․봉양재기․봉양재기문․봉양재상량문․봉양재사실기․봉양재실기를 추가하여 실었다.

 

[8]▶범육장(氾六丈)

 

중국 송나라 사람. 휘는 중엄(中淹)으로 육장(六丈)은 호이다. 녹양루기(綠楊樓記)에 강호에 있을 때 임금을 걱정하고 조정에 있을 때는 백성을 걱정하며 천하를 먼저 걱정하고 천하 사람들이 즐거워 한 다음 즐거워한다는 고사가 있다.

 

[9]▶옥산정(玉山亭)

 

합천군 대병면 성내리 마을 동쪽 도로변에 아주작은 옥을 닮은산이 있다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 있지만 그곳에 옷정이있었다 대병 이라고 불리워지는 이곳은 악견산(岳堅山)이 마을 뒤쪽으로 높이 솟아있고 마을 앞으로는 알맞은 작은 들이 펼쳐진 평화스러운 곳이다. 악견산의 한 자락이 아래로 뻗어 내려와 들머리에 작은 봉우리가 우뚝 솟아있었는데 졸당 선생이 밀양의 삽포(揷浦)에서 처가 곳인 이곳으로 옮겨와 살면서 여기에다 작은 단(壇)을 쌓고 정자를 얽어 주변에 소나무 여덟 그루를 심고 당대의 여러 석학들과 교유(交遊)하면서 술도 마시고 시를 읊으며 학문을 토론하여 만년을 여유 자적하게 보내신 곳이다. 후에 여덟 분의 졸당 후손이 관직에 있으면서 이곳 정자에 올라 차고있는 관인을 걸었다고 하여 팔괘정(八卦亭)이라고도 한다.

 

지금은 그 자리에 석축과 정자는 간데 없고 몇 그루의 소나무와 작은 봉우리만 논가운데 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 곳이 안동 권씨 소유 토지로 변하여 후손들에게는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근세에 와서 후손 희정(熙廷) 상태(尙台)등 족조(族祖)께서 주선하여 옥산정 유허비를(東洋 申斗善 지음) 세웠으나 그 장소와 동 떨어진데 위치하여 더욱 가슴을 아프게 한다.

 

1980년대 말에 뜻있는 종후손(宗後孫)의 주선으로 졸당 할아버지의 유적지에 대한 내력을 적어 옥산정에서 약간 거리에 있는 봉산제 들어가는 입구 삼거리 도로변에 졸당 선생 유허비를 세웠다.(비문은 李憲柱가 지음)

 

옥산정이 있었던 장소 옥산을 우리 후손들에게는 졸당 할아버지를 기릴 수 있는 뿌리 깊은 성지(聖地)이므로 앞으로 독지가 후손들이 서로 힘을 합하여 이 장소를 매입하고 새롭게 복원하였으면 한다.

 

[10]▶허유(許愈)

 

[11]▶이헌주(李憲柱)

 

[12]▶신계서원(新溪書院)

 

경상남도 산청군 신안면 문대리 진태 마을 후록(後麓)에 위치해있다. 송은공과 그 의아들 졸당을 배향하고 있다. 고종 초에 대원군의 서원 철폐에 따라 신계사(新溪祠) 혹은 신계서당으로 통칭되고 있다. 1980년대 말에 흐무러진 담장과 사우 및 재실을 크게 중수하였다.

 

재실(齋室)과 제기(祭器) 18점이 지방문화재 135호로 지정되어 있다.

 

제작당시에는 반기 7개, 술준 3개, 술쭉 1개, 술잔 9개, 향로 3개, 촛대 6개, 향합 3개등 모두 32점이 제작되었으나 일제시대에 촛대 2개, 향합 2개를 빼앗기고 6•25동란시 폭격으로 인해 술준 1개, 반기 1개가 파손되었다.

 

현재는 술잔 6개, 술준 2개, 밥그릇 방형 4개, 원형 2개, 촛대 2개, 향합 1개 등 18점이 남아 있다.

 

이 그릇들은 제기로서는 드물게 청동을 원료로 사용하였으며 매년 3월 초정일(三月 初丁日) 신계서원에서 모셔지는 송은 선생의 제사에 사용해오고 있으며, 신계서원에서 관리하고 있다.



[13]▶정부인(貞夫人)

 

정삼품의 품계를 가진 관직자의 아내에게 주는 칭호

 

[관련문헌]

字暝翁 松隱之四子 號拙堂 圃隱門人 官戶曹正郞 贈吏曹參判 己亥 配新溪書院

 

〈密陽 朴氏 大宗譜 入享諸賢 篇〉

 

자는 명옹이며 송은의 넷째 아들이다 호는 졸당이다. 포은의 문인으로 벼슬은 호조정랑을 지냈고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 기해년에 신계서원에 배향 되었다.〈밀양박씨 대종보 입향제현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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